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안토니오 살리에리 (문단 편집) == 음악 == || [youtube(JvMXFIlSWVU)] || || 오페라 '오르무스의 왕 악수르' 中 피날레[* 영화 [[아마데우스(영화)|아마데우스]]에서 살리에리가 이 파트를 지휘하는 장면이 나왔다.] || 그는 시기적으로나 지역적으로나 빈 고전파의 권역에 속해 있으며 이 악파의 음악 양식을 충실하게 따르고 있다. 주로 [[오페라]]와 종교음악 분야에 많은 작품을 남겼으며 기악곡은 상대적으로 적은 편이다. 살리에리는 평생 37편의 오페라를 썼는데, 대부분이 이탈리아어로 된 정가극(오페라 세리아)이나 희가극(오페라 부파)이다. 다만 빈에 진출한 지 얼마 안 된 시점인 1781년에 '굴뚝 청소부(Rauchfangkehrer)'라는 독일어 오페라(징슈필)[* Singspiel. 18세기 후반~19세기 초에 독일어권에서 유행했으며, [[아리아]]나 중창, 합창 등 노래로 된 부분과 순전히 대사로만 된 부분으로 나뉜다. 다시 말해 [[레치타티보]]가 없다. 따라서 오페라와 연극의 중간 형태라고도 볼 수 있을 듯. 모차르트의 [[마술피리]]가 이 장르의 대표적인 작품이다.]를 쓴 적이 있고 프랑스 극단의 의뢰를 받아서 프랑스어로 작곡한 오페라도 몇 곡 있다. 살리에리는 이탈리아 출신이긴 했지만 파이지엘로와 같은 정통 이탈리아 오페라 스타일을 답습하기 보다는 [[크리스토프 빌리발트 글루크|글룩]]을 필두로 한 새로운 경향의 오페라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래서 살리에리의 오페라는 이탈리아 본토의 오페라처럼 화려하고 기교가 넘치는 아리아가 적은 대신 좀더 서정적이고 부드러운 창법을 갖는 아리아가 많다. 대표적인 작품으로 '오르무스의 왕 아주르'(Axur, re d'Ormus,1788), '치프라'(La Cifra,1789), '페르시아의 여왕 팔미라'(Palmira, regina di Persia,1795), '팔스타프'(Falstaff, 1799)[* 똑같은 제목으로 [[주세페 베르디]]가 쓴 마지막 오페라와 혼동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등이 있다. 그의 오페라가 흥행에 실패한 경우는 거의 없었으며 생전의 인기만 보면 당시 빈에서의 인기는 '''모차르트보다 살리에리의 인기가 훨씬 더 좋았다.''' 이 한마디로 그가 단지 선생만이 아닌 음악가 본업으로서도 엄청났다는 것. 그 예시중 하나로 1789년 12월에 상연된 오페라 부파 '치프라'(La Cifra)는 비슷한 시기(1790년 1월)에 상연된 모차르트의 같은 장르 오페라인 '코지 판 투테'(Così fan tutte)보다 더 인기를 끌었으며 15년 뒤인 1805년까지도 자주 상연되었다.[* 다만 코지 판 투테도 실패한 것은 아니고 나름대로 인기를 얻었다. 초반 흥행을 기준으로 상대적으로 치프라에 밀렸을 뿐. 당시 살리에리의 명성과 실력을 고려하면, 모차르트 입장에서는 그와 비교된다는 것이 도리어 엄청난 명예였기도 했다.] 하지만 18세기 말부터 살리에리가 주력으로 삼았던 이탈리아 양식의 오페라가 점차 쇠퇴하고 새로운 수법의 오페라가 인기를 얻었다. 19세기 이후 그가 작곡한 오페라는 시간이 지날수록 관심을 덜 받게 된 반면 그가 흥행 면에서 한 수 아래라고 생각했던 모차르트의 오페라가 작곡가 사후 재평가받으면서 계속 인기가 높아졌으며, 1810년대에는 [[빌헬름 텔]]로 유명한 [[로시니]]가 빈의 오페라계를 휩쓸기도 했다. 이 시점부터 살리에리는 시대의 변화를 받아들이고 기존의 작품을 개작하거나 가끔 종교음악, 기악곡을 내는 것 외엔 음악가로서 활동을 대폭 줄였고 그 대신 후배 작곡가의 육성에 더욱 집중했다. 생전에는 남부럽잖게 살았던 살리에리였지만 오늘날에는 당시 시대를 풍미했던 여러 '''빈 고전파 음악가 중 한 명''' 정도로만 평가받고 있으며, 그와 동시대에 활동했던 하이든이나 모차르트 등 클래식계의 [[사기캐]]로 인정받는 음악가들과는 확실하게 위상 차이가 있다. 그는 글룩의 오페라 철학을 응용하는 등 나름 새로운 시도를 하기도 했지만 기본적으로 보수적인 성향의 작곡가였으며 새로운 음향이나 음악양식을 실험하기보다는 당대의 문법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좀더 안전하고 무난한 길을 택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오늘날 관점에서 그의 오페라는 아무래도 임팩트가 많이 부족한 편이다. [[모차르트/오페라|모차르트의 후기 오페라]]들이 설득력 있는 서사(narrative)를 갖추고[* 물론 마술피리같은 환타지풍의 작품도 있고 너무 급하게 써서 스토리에 신경을 쓰지 못한 티토왕의 자비와 같은 작품도 있다. 자세한 것은 [[모차르트/오페라|항목]] 참조.] 등장인물들의 개성도 뚜렷한 반면, 살리에리의 오페라는 대체로 스토리가 밋밋하고 등장인물의 성격도 전형성을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다만 당시 청중들에게는 동시대의 관습에 충실한 살리에리의 오페라가 부담이 적고 쉽게 느껴졌으며 한편으로 그 본인이 빈 음악계의 큰손이었기 때문에 그의 오페라가 오랫동안 모차르트의 작품보다 더 인기를 누릴 수 있었다. 그래서인지 베토벤이나 슈베르트 등 살리에리에게 배웠던 많은 후배 작곡가들이 정작 음악적 롤모델은 살리에리가 아니라 하이든과 모차르트를 선택했다.[* 다만 살리에리가 이런 수모를 겪은 것은 그의 음악의 수준이 떨어져서 그런 것이 아니라 기악 작품을 많이 남기지 않았던 탓이 더 크다. 음악 공부를 해 본 사람은 잘 알겠지만 처음 작곡을 배울 때에는 주로 기악곡을 바탕으로 배운다. 그리고 살리에리에게서 배웠던 유명한 음악가 대다수가 주로 기악 분야에서 큰 업적을 남겼다.] 그래도 다행스러운 것은 20세기 후반부터 잊혀진 클래식 작품들을 재발굴하는 분위기가 생기면서 살리에리의 오페라들도 다시 복원되고 있다는 것. 치프라를 비롯해 전술한 작품들은 간헐적으로 무대에 오르고 있다. 한편 쉽게 무대에 올릴 수 있는 독창곡이나 기악곡의 수가 적은 것도 살리에리 음악의 복원에 걸림돌이 되고 있다. 오페라 외에도 나름 교향곡과 피아노 협주곡 등도 작곡하긴 했는데 대체로 초기작품이다.[[https://www.youtube.com/watch?v=6qsc5-Vm4Bk|살리에리의 피아노 협주곡]] 하지만 그의 나이 65세인 1815년에 작곡한 [[아르칸젤로 코렐리#s-3.3|라 폴리아]] 주제에 의한 26개의 관현악 변주곡(26 Variationen über "La Folia di Spagna")은 만년의 걸작으로 인정받고 있는데, 들어보면 알겠지만 나름 낭만주의적인 수법도 엿보이고 하프와 바이올린이 인상적인 독주를 보여주는 등 상당히 흥미로운 작품이다. || [youtube(GbC1wRk20vA)] || || 라 폴리아 주제에 의한 26개의 관현악 변주곡(26 Variationen über "La Folia di Spagna") ||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